MGM-31 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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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GM-31 퍼싱은 미국이 개발한 중거리 탄도 미사일로, 1950년대 후반 개발이 시작되어 퍼싱 I, 퍼싱 Ia, 퍼싱 II의 파생형으로 발전했다. 퍼싱 I은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생산되었으며, 740km의 사거리를 가진 핵탄두 탑재 미사일로, 유럽에 배치되었다. 퍼싱 II는 1980년대에 개발되어 사거리가 1,770km로 증가했고, 능동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여 정밀도를 높였다. 이 미사일은 미국 육군과 독일 공군에서 운용되었으나, 1988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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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M-31 퍼싱 | |
---|---|
개요 | |
![]() | |
명칭 | MGM-31 퍼싱 |
용도 | 지대지 전역 공격 |
분류 | 단거리 탄도 미사일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
개발 및 생산 | |
제작사 | 마틴 (마틴 마리에타) |
생산 대수 | MGM-31A/B: 754기 MGM-31C: 380기 |
운용 | |
운용 국가 | (미국 육군) (서독 공군) |
최초 비행일 | 1960년2월 25일 |
운용 시작일 | 1962년6월 |
퇴역일 | 1988년10월 |
운용 현황 | 퇴역 |
MGM-31A 퍼싱 I 상세 정보 | |
종류 | 단거리 탄도 미사일(SRBM) |
제작사 | 마틴 마리에타 |
운용 국가 | 24발 16발 |
개발 | 1958년 -1960년 |
도입 | 1962년 - 1969년 |
다음 모델 | MGM-31B 퍼싱 II |
엔진 | 2단 고체 연료 |
1단 엔진 | 티오콜 TX-174, 추력 25,900 lbf (115 kN) 연소시간 38.3 초 |
2단 엔진 | 티오콜 TX-175, 추력 19,100 lbf (85 kN), 연소시간 39 초 |
발사 중량 | 10,275 lb (4,661 kg) |
길이 | 34.6 ft (10.5 m) |
직경 | 40 in (1 m) |
속력 | 마하 8 |
사거리 | 460 마일 (740 km) |
탄두 | W50 핵탄두, 190 kg, 60, 200, 400 kt |
유도 방식 | 관성 항법, 레이다 종말 유도 |
발사대 | 이동식 트럭(TEL) |
2. 역사
레드스톤 미사일의 후속으로 개발된 퍼싱 I 미사일은 길이가 69.3 ft에서 34.6 ft로 줄었고, 사거리는 201 마일에서 460 마일로 늘어났다.
1956년 마틴 컴퍼니 사장 조지 벙커는 앨러배마 주 레드스톤 무기고를 방문해 미국 육군 탄도 미사일국(ABMA)의 존 메다리스 대장을 만났다. 메다리스는 플로리다주 공군 미사일 테스트 센터(현재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기지) 근처에 미사일 공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57년 마틴 컴퍼니는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샌드 레이크 시설에 미사일 공장을 건설했다. 바주카포를 공동 개발한 에드워드 얼이 부사장 겸 새로운 공장의 공장장이 되었다.
1956년 미국 육군은 사거리 500–750 해리 (930–1,390 km)의 탄도 미사일 연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 후반에 찰스 어윈 윌슨 국방장관은 미국 육군이 사거리 200 마일 (320 km) 이상인 탄도 미사일은 보유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윌슨 메모"를 발표했다.
1958년 미국 국방부는 윌슨 메모를 폐지했고, 미국 육군 탄도 미사일국(ABMA)은 탄도 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레드스톤-S라고 불렀는데, S는 고체연료(solid propellant)를 의미했다. 이후 육군 대장 존 J. 퍼싱을 기념해 퍼싱 미사일이라고 개명했다. ABMA는 7개 회사를 개발 후보로 선정했다.
2. 1. 개발 배경
레드스톤 미사일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퍼싱 I 미사일은 길이가 69.3피트에서 34.6피트로 줄었고, 사거리는 201마일에서 460마일로 늘어났다.1956년 미국 육군은 사거리 500~750해리(930~1,390km)의 탄도 미사일 연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 후반, 찰스 어윈 윌슨 국방장관은 미국 육군이 사거리 200마일(320km) 이상인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윌슨 메모"를 발표했다. 1958년 미국 국방부는 이 메모를 폐지했고, 미국 육군 탄도 미사일국(ABMA)은 탄도 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처음에 이 미사일은 레드스톤-S로 불렸는데, 여기서 S는 고체 연료(solid propellant)를 의미했다. 이후 존 J. 퍼싱 육군 대장을 기념하여 퍼싱 미사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ABMA는 크라이슬러, 록히드 코퍼레이션, 더글러스 항공기 회사,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컨베어 부문, 파이어스톤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 스페리 코퍼레이션, 마틴 컴퍼니 등 7개 회사를 개발 후보로 선정했다.
1956년 당시 마틴사 사장 조지 벙커는 레드스톤 병기창에 있는 미국 육군 탄도 미사일국(ABMA)의 국장 John Bruce Medaris|존 브루스 메다리스영어 소장을 방문했다. 메다리스는 미사일 공장이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근처에 있으면 육군에 유리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마틴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샌드레이크 시설 건설을 시작하여 1957년 후반에 개업했다. 바주카의 공동 발명자인 Edward Uhl|에드워드 유얼영어이 이 회사의 부사장이자 신규 시설의 제너럴 매니저였다.
전 미시간주 주지사였던 윌버 브루커 육군 장관은 미시간주의 기업에 계약을 주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는 미시간주 출신의 유일한 계약자였지만, 메다리스는 브루커를 설득하여 결정을 ABMA에 전적으로 맡기도록 했다. 메다리스 장군과 아서 루돌프 박사의 선정 작업 후, 정부의 기술적 감독 및 설계 개념 관리 하에 퍼싱 시스템의 연구, 개발 및 초기 생산의 CPFF(cost-plus-fixed-fee, 원가 및 고정 계약금) 계약이 마틴사(1961년 합병 후 마틴 마리에타)에 주어졌다. 마틴의 퍼싱 담당 품질 관리 매니저였던 Philip B. Crosby|필 크로스비영어는 시스템의 생산성과 신뢰성을 강화한 제로 디펙트(Zero Defects, ZD 운동)의 개념을 개발했다.
2. 2. 개발 과정
마틴 컴퍼니(1961년 합병 후 마틴 마리에타)가 주 계약자로 선정되어 퍼싱 시스템의 연구, 개발 및 초기 생산을 담당했다.[4] 이 계약은 정부의 기술 감독 및 설계 개념 관리 하에 이루어지는 CPFF(cost-plus-fixed-fee, 원가 및 고정 계약금) 방식이었다. 마틴 컴퍼니의 퍼싱 담당 품질 관리 매니저였던 필 크로스비는 시스템의 생산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무결점(Zero Defects, ZD 운동) 개념을 개발했다.[4]XM-14 연구 개발용 시험 미사일은 1960년 2월 25일에 처음 발사되었다.[6]
3. 파생형
MGM-31A 퍼싱 I과 MGM-31A 퍼싱 Ia는 외형과 사거리가 동일하다. 퍼싱 I은 1962년부터 1969년까지, 퍼싱 Ia는 1969년부터 1991년 소련 붕괴 시까지 실전 배치되었다. 퍼싱 I의 비행 속도를 높여 신속한 공격이 가능하게 개량한 것이 퍼싱 Ia이다. 1971년 퍼싱 1a는 아날로그 전자부품에서 하나의 디지털 컴퓨터로 유도 장치가 개선되었다.[1]
MGM-31A 퍼싱 I 미사일은 퍼싱 I과 퍼싱 Ia를 합쳐 총 754발이 생산되었다.
- XM-14: 연구 개발 시험용 시제품
- XM-19: XM14의 훈련용 불활성 탄두탄 (이너트 탄)
- XMGM-31A: 1962년의 명칭 통일에 따른 명명 규칙 변경으로 인해 1963년 6월에 XM-14에서 개명
- XMTM-31B: 1962년의 명칭 통일에 따른 명명 규칙 변경으로 인해 1963년 6월에 XM-19에서 개명
- MGM-31A: 퍼싱 I (초기 생산형), 퍼싱 Ia
- MGM-31B: 퍼싱 II[5]
3. 1. 퍼싱 I (MGM-31A)
MGM-31A 퍼싱 I은 레드스톤 미사일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단거리 탄도 미사일이다. 1956년 마틴 컴퍼니(이후 마틴 마리에타)는 미 육군과 계약을 맺고 퍼싱 시스템을 개발했다. 퍼싱 미사일은 육군 대장 존 J. 퍼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960년 2월 25일 첫 시험 발사가 이루어졌고,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운용되었다. 퍼싱 I은 무게 4,655kg, 사거리 740km였으며, 2단 고체 로켓을 사용했다. W50 핵탄두를 탑재했으며, 60kt, 200kt, 400kt의 세 가지 위력 옵션이 있었다.[6] 티오콜(Thiokol) 고체 추진제 모터를 사용했으며, 추력 반전과 케이스 배출을 통해 사거리를 조절했다. 이클립스-파이오니어 ST-120 관성 항법 시스템을 통해 유도되었다.
퍼싱 I 발사 소대는 FMC 코퍼레이션에서 제작한 4대의 M474 궤도 차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레드스톤 미사일이 20대의 차량을 필요로 했던 것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1964년, 미국 국방부는 퍼싱 무기 체계를 신속 대응 경보(QRA) 역할로 지정했다.[7]
항목 | 내용 |
---|---|
길이 | 10.5m |
직경 | 1.02m |
발사 중량 | 4655kg |
속도 | 마하 8 |
사정거리 | 740km |
기관 | |
탄두 | W50 열핵탄두 (핵 출력: 400kt) |
3. 1. 1. 배치
1961년 마틴은 퍼싱을 기반으로 한 위성 발사 시스템을 제안했다.[9] 페가수스는 더 가볍고 간소화된 유도부와 짧은 3단 부스터를 가졌고, 60lb의 탑재량을 210mi의 주회 궤도 또는 700mi의 원지점에 접하는 타원 궤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페가수스는 퍼싱의 직립 발사기를 사용하여 열린 장소라면 어디든 설치할 수 있었다. 마틴은 발전하고 있는 유럽의 우주 계획을 목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계획은 개발되지 않았다.1965년 미국 육군은 개발, 시험 및 평가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응용물리 연구소(Applied Physics Laboratory, APL)와 계약을 체결했다.[10] APL은 퍼싱 작전 운용 시험 부대(Pershing Operational Test Unit, POTU)에 기술 지원을 제공하고, 문제점을 파악하여 퍼싱 시스템의 성능과 생존성을 개선했다.
당초 계획은 10개 미사일 대대( 포트 실에 1개, 한국에 1개, 서독에 8개)를 편성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포트 실에 1개 대대, 서독에 3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각 미사일 대대는 배치를 위해 포트 실에서 조직되었다. 최초의 전술 퍼싱 부대는 제2 미사일 대대, 제44 포병 연대였고, 그 다음으로 제4 미사일 대대, 제41 포병 연대가 슈바비슈 그뮌트에 배치되었으며, 제1 미사일 대대, 제81 포병 연대는 바케나임의 매컬리 막사에 배치되었다. 각 미사일 대대는 4개의 발사기를 보유했다.
제2 미사일 대대, 제79 포병 연대는 1964년 2월 한국에 배치되기 위해 편성되었으나, 배치는 보류되었다. 이 대대는 제56 포병 그룹과 독일 공군 미사일 비행대가 화이트 샌즈 미사일 레인지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때 지원했다. 제85 미 육군 야전 포병 분견대는 1966년 11월 포트 실에서 조직되어 제2/79 포병에 배속되었다. 한국 배치는 취소되었고 제2/79 포병은 해체되었다.
1964년, 미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 연구를 통해 퍼싱이 신속 대응 경보 임무에 전술 항공기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퍼싱 무기 체계를 신속 대응 경보(QRA) 역할로 지정했다. 독일 공군은 포트 실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각 미사일 대대는 이후 6개의 발사기를 승인받았고, 1965년에는 발사기가 8개로 증가했으며, 발사 포대당 2개씩이었다. 1965년까지 3개의 미 육군 대대와 2개의 독일 공군 비행대가 독일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제579 병기 중대는 독일의 퍼싱 포병 부대에 대한 유지보수 및 군수 지원을 담당했다.
3. 2. 퍼싱 Ia (MGM-31A)
1960년 생산된 퍼싱 I을 개량한 퍼싱 Ia는 1969년부터 생산되었다. 무게 4,655 kg, 400 kt W50 핵탄두, 사거리 740 km로, 2단 고체로켓을 사용하며 외양과 사거리는 퍼싱 I과 동일하다. 퍼싱 I의 비행 속도를 높여 더 빠른 공격이 가능하도록 개량되었다.[1]1971년에는 아날로그 전자부품에서 디지털 컴퓨터로 유도 장치가 개선되었다. 1974년에는 미사일 및 발전소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미사일 부품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유지 보수를 줄이며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새로운 디지털 유도 및 제어 컴퓨터는 아날로그 제어 컴퓨터와 아날로그 유도 컴퓨터의 기능을 하나로 통합했다. 평균 수리 시간은 8.7시간에서 3.8시간으로 감소했고, 고장 간 평균 시간은 32시간에서 65시간으로 증가했다.
1976년에는 측량이 필요 없이 어떤 장소에서든 소대 소속 3기의 미사일을 연달아 빠르게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 기준 시스템(ARS)은 광학 레이저 링크와 북극 탐색 자이로를 사용하여 사전에 선택 및 측량된 지점이 필요 없도록 했다. 순차 발사 어댑터는 PTS를 3기의 미사일에 연결하여 각 발사대를 케이블로 연결하고 분리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MGM-31A 퍼싱 I 미사일은 퍼싱 I과 퍼싱 Ia를 합쳐 총 754발이 생산되었다. 1985년 퍼싱 II 폭발 사고 이후, 독일 공군의 퍼싱 1a 발사기에는 탄도 방어막이 장착되었다.
1987년 육군과 미국 에너지부의 공동 연구 결과, 퍼싱 1a가 탑재한 W50 탄두를 퍼싱 II용으로 개발된 W85 탄두로 교체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중거리 핵전력 조약 서명으로 인해 전환 개발은 중단되었다.[1]
3. 2. 1. 배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2월 11일 케이프 커내버럴을 방문했을 때, 1960년 5월 5일 포트 베닝에서 프로젝트 MAN(현대 육군 요구)의 일환으로 퍼싱 미사일을 시찰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퍼싱을 세 번 시찰했는데, 1961년 취임식 퍼레이드의 일환으로, 1961년 10월 12일 포트 브래그에서, 1963년 화이트 샌즈 미사일 레인지에서였다.당초 계획은 10개 미사일 대대를 포트 실에 1개, 한국에 1개, 서독에 8개 편성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포트 실에 1개 대대, 서독에 3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최초의 전술 퍼싱 부대는 제2 미사일 대대, 제44 포병 연대였고, 제4 미사일 대대, 제41 포병 연대가 슈바비슈 그뮌트에, 제1 미사일 대대, 제81 포병 연대는 바케나임의 매컬리 막사에 배치되었다. 각 미사일 대대는 4개의 발사기를 보유했다.
제2 미사일 대대, 제79 포병 연대는 1964년 2월 한국 배치를 위해 편성되었으나 보류되었고, 제56 포병 그룹과 독일 공군 미사일 비행대가 화이트 샌즈 미사일 레인지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때 지원했다. 제85 미 육군 야전 포병 분견대는 1966년 11월 포트 실에서 조직되어 제2/79 포병에 배속되었다. 한국 배치는 취소되었고 제2/79 포병은 해체되었다.
국방부 연구 결과 퍼싱이 신속 대응 경보 임무에 전술 항공기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964년에 퍼싱 무기 체계는 신속 대응 경보(QRA) 역할로 지정되었다. 독일 공군은 포트 실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각 미사일 대대는 6개의 발사기를 승인받았다. 1965년에는 발사기가 8개로 증가했으며, 발사 포대당 2개씩이었다. 1965년까지 3개의 미 육군 대대와 2개의 독일 공군 비행대가 독일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제579 병기 중대는 독일의 퍼싱 포병 부대에 대한 유지보수 및 군수 지원을 담당했다.
유럽의 대대들은 새로운 조직 및 장비표(TOE)에 따라 재편성되었으며, 보안 강화를 위해 보병 대대가 추가되었고, 제56 포병 그룹은 제56 야전 포병 여단으로 재편성 및 재지정되었다. 무기 체계의 특성상 장교 직위는 한 계급씩 증가하여, 포병대대는 소령이, 대대는 대령이, 여단은 준장이 지휘했다.
퍼싱 1a는 3개의 미국 대대와 2개의 독일 공군 비행대와 함께 유럽에 배치되었다. 각 대대 또는 비행대는 36개의 이동식 발사기를 보유했다. 서독은 헌법상 핵무기 소유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핵탄두 통제는 미국 육군이 계속 유지했다. 평시에는 퍼싱 1a 자산 일부가 QRA 임무에 투입되었고, 나머지는 야전 훈련을 수행하거나 병영에 대기했다. 고도의 기동성을 갖도록 설계되어 경계 또는 전쟁 시 비밀 장소로 분산이 가능했고, 전투 지역 최전선 또는 정치적 국경에서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기동성과 후퇴 능력으로 인해 퍼싱은 유럽에 배치된 극장 핵무기 중 생존성이 가장 높은 무기 중 하나로 여겨졌다.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 계획에 따른 주요 임무는 평시 또는 긴장 상태라는 두 가지 준비 태세 강화 형태로 진행되었다. 임무 형태에 따라 다양한 수준 또는 기법의 임무 할당이 사용되었다. 평시 신속 대응 경계 임무는 각 대대 또는 비행대에 대해 1개의 발사 포대 또는 그 일부가 지정된 표적을 감시하며 영구적인 경계 태세(CAS)를 유지해야 했다. 평시에는 각 대대의 4개 포대가 4가지 경계 태세 또는 조건으로 순환했으며, 가장 높은 단계는 CAS 포대였다. 이 순환의 목적은 CAS 상태 유지, CAS 책임 분담, 야전 전술 훈련 및 장비 유지 보수 시간 제공, 작전 요구 사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인원에게 충분한 휴가 및 외출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긴장 상태가 증가하는 기간에는 각 대대의 발사 포대가 이전에 사용하지 않던 야전 전술 기지로 배치되어 모든 지정된 표적에 대한 임무를 수행했다. 평시에서 완전한 전투 상태로 전환하는 동안에는 평시 CAS 포대에 할당된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표적에 대한 감시가 유지되었다. 모든 발사 포대가 야전 기지에 배치되면 대대의 발사 요소는 소대 단위로 배치되었고,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소대는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무작위 일정에 따라 새로운 발사 위치로 이동했다.
1964년, 퍼싱 I의 신뢰성 측정 시험 후, 국방부 장관은 육군에 퍼싱을 즉각적인 경계 임무(QRA)에 적합하게 개수하도록 요구했다. 1965년 퍼싱 Ia 개발 계획이 승인되었고, 초기 퍼싱은 "퍼싱 I"으로 개칭되었다. 마틴 마리에타는 1967년 중반 퍼싱 Ia 생산 계약을 수주했다. 제44야전포병연대 제2대대는 1969년 포트 질에서 장비를 수령했다. 프로젝트 SWAP는 1970년 중반까지 독일의 퍼싱 장비 전부를 교체했으며, 최초 부대는 신속하게 QRA 상태를 획득했다.
'''퍼싱 Ia'''는 더 빠른 차량, 신속한 발사 시간, 새로운 전자 장치를 갖춘 즉각적인 경계 시스템이었다. 발사기 총 수는 대대당 8기에서 36기로 증강되었다. 1969년 5월부터 배치되었고, 1970년까지 거의 모든 퍼싱 I 시스템은 프로젝트 SWAP 하에 퍼싱 Ia로 업그레이드되었다. 1975년 생산이 종료되었고, 1977년 훈련 중 소모되는 미사일 교체를 위해 재개되었다. 1970년대 중반 퍼싱 Ia 시스템은 측량 없이 소대의 3기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754기의 퍼싱 I/Ia 미사일이 제조되었고, 180기가 유럽에 배치되었다.[11]
유럽의 대대는 새로운 편성 및 장비표(TOE) 하에 재편성되었다. 시스템의 안전 확보를 위해 보병 대대 편성이 승인되었다. 제56포병대군이 재편성되어 제56야전포병여단으로 개명되었다. 퍼싱 시스템의 특성상 지휘관 계급이 한 계급씩 올라가, 포병중대는 대위 대신 소령이, 대대는 대령이, 여단은 준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직립 발사기(EL)는 포드 M757 5톤 트랙터로 견인되는 개수된 로우보이 플랫베드 트레일러였다. 엘리베이션 붐은 3,000psi의 유압 공압 병용 시스템을 사용하여 9초 만에 수평 위치에서 수직 위치까지 약 5톤의 미사일을 세울 수 있었다. PTS와 PS는 포드 M656 트랙터에 장착되었다. 발사 시 기동은 발사기 근처에 배치되거나 포병 중대 지휘 본부(BCC)에 설치된 원격 발사 상자에서 실행되었다. 3기 발사기 당 1개의 PTS가 제어를 담당했지만, 1기 발사 완료 후 10개의 큰 케이블을 다음 발사기로 이동해야 했다.
1974년 미사일 구성 요소 접근성 향상, 유지 보수 감소, 신뢰성 개선을 위한 미사일과 PS 재패키징 작업이 완료되었다. 새로운 디지털 유도/제어 컴퓨터는 아날로그 제어 컴퓨터와 아날로그 유도 컴퓨터 기능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했다. 평균 보정 유지 보수 시간은 8.7시간에서 3.8시간으로, 평균 고장 간격은 32시간에서 65시간으로 개선되었다. 1976년 연속 발사 어댑터(SLA)와 자동 참조 시스템(ARS)이 도입되었다. SLA는 10대 트레일러에 장착된 자동 전환 장치로, PTS가 3개 발사기에 모두 연결된 채 유지되도록 했다. 이는 3개 발사기가 핫 상태(언제든 발사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했고, 발사 간격을 단축했다. ARS는 미사일 내 북방 탐색 자이로와 ST-120으로의 레이저 링크를 포함하며, 기존 미사일 조준, 방위 조정에 사용되던 경위의를 불필요하게 했다. ARS 준비 후, 콜드 상태(탄체는 있지만 발사기에 없거나 액체 연료 로켓의 경우 추진제 미충전 등 즉시 발사 불가능 상태) 미사일은 짧은 시간에 방위 조정이 가능했다.
3. 3. 퍼싱 II (MGM-31B)

'''퍼싱 II''' 무기 체계는 고체 연료 2단계 탄도 미사일로, 마틴 마리에타가 미국 육군의 주요 핵 탑재 극장급 무기로 퍼싱 1a 야전 포병 미사일 체계를 대체하기 위해 설계 및 제작했다.[12] 미국 육군은 1983년 퍼싱 II로 퍼싱 1a를 대체했으며, 독일 공군은 1991년 모든 퍼싱이 제거될 때까지 퍼싱 1a를 유지했다.
1973년 후속 시스템 개발을 위한 태스크 포스가 설립되었다. 400kt 탄두는 QRA 임무에는 과도한 위력이었고, 더 작은 탄두로 정밀도를 추구했다. 1975년 마틴 마리에타와 계약이 체결되었고, 1977년부터 최초 개발 발사가 시작되었다. '''퍼싱 II'''는 5~50kt의 가변 핵출력을 가진 신형 W85 핵탄두 또는 지중 관통하는 W86 핵탄두(핵 탑재 벙커 버스터)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탄두는 능동 레이더 유도의 기동 재진입체 (MaRV)로 패키지화될 예정이었으며, 퍼싱 I의 로켓 엔진으로 발사되었다. 1975년, 미국은 이스라엘로부터 신형 퍼싱 II 판매 요청을 거절했다.
소련은 1976년 RT-21M 파이오니어 (SS-20) 배치를 시작했다. SS-20의 첫 번째 버전이 4400km의 사거리와 2개의 탄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퍼싱 II의 요구 사양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사거리를 1600km로 늘리도록 변경되었다. SALT II에서의 합의 때문에, 새로운 발사기를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퍼싱 Ia의 발사기를 업그레이드하여 새로운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도록 맞춰야 했다. 경화 목표 능력과 W86 핵탄두는 1980년에 취소되었고, 제조된 모든 퍼싱 II는 W85 핵탄두를 탑재했다.
퍼싱 II의 신형 로켓 모터는 허큘리스에 의해 제작되었다. 탄체 중량을 줄이기 위해 로켓 보틀은 알루미늄제 연결 링을 가진 케블라 섬유가 사용되었다. 재진입체 (RV)는 유도 및 제어부 (G&CC), 탄두부 (WHD) 및 레이더부 (RS)로 구성되었다. G&CC는 백업으로 순수한 탄도 모드로 정확한 미사일을 유도할 수 있는 싱어 케어포트의 관성 유도 장치도 가지고 있었다. 주 유도 장치는 굿이어 에어로스페이스의 능동 레이더 유도 장치였다. 목표 지역의 레이더 지도를 사용하여, 미사일은 CEP 30m의 정밀도를 가졌다.
이전 시스템에 필요했던 차량 탑재 PTS 기능은 발사기 옆 패널에 통합되었다. 발사기를 이동하기 위한 이동력은 미국 부대를 위한 M983 HEMTT와 독일 부대를 위한 MAN 트랙터였다. 트랙터는 미사일 조립에 사용되는 크레인, 그리고 전력을 발사기와 미사일에 제공하기 위한 발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신형 유도 장치는 자기 방위 조정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사기는 어떤 측량 사이트에도 설치할 수 있었고, 몇 분 안에 발사될 수 있었다.
퍼싱 II 미사일은 약 380기가 제조되었고, 1984년 1월부터 서독에 처음 배치되었다. 1985년 후반까지 총 108기의 발사기가 유럽에 배치되었다.
항목 | 내용 |
---|---|
전장 | 10.6m |
직경 | 1.02m |
발사 중량 | 7490kg |
속도 | 마하 8 이상 |
사정 거리 | 1770km |
기관 | 허큘리스 2단식 고체 연료 로켓·모터 |
탄두 | W85 열핵탄두 MaRV (핵 출력: 5~50kt) |
4. 운용 부대
MGM-31 퍼싱 미사일을 운용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
4. 1. 미국 육군
- 제56포병단 (1963–1970), 제56포병여단 (1970–1972), 제56야전포병여단 (1972–1986)
- 제1미사일대대 제81포병연대 (1963–1972), 제1대대 제81야전포병연대 (1972–1986)
- 제3미사일대대 제84포병연대 (1963–1968), 제3대대 제84야전포병연대 (1968–1986)
- 제4미사일대대 제41포병연대 (1963–1971), 제1미사일대대 제41포병연대 (1971–1972), 제1대대 제41야전포병연대 (1972–1986)
- 제214포병단 (1958–1972), 제214야전포병단 (1972–1979), 제214야전포병여단 (1979–1991)
- 제2미사일대대 제44포병연대 (1962–1971), 제3대대 제9야전포병연대 (1971–1990)
- 제1야전포병 미사일 여단
- 제2미사일대대 제79포병연대 (1964–1968)
4. 2. 독일 공군(서독)
- 제1미사일비행단 (Flugkörpergeschwader 1|플루크쾨르퍼게슈바더 1de)
- * 제12미사일그룹 (Flugkörpergruppe 12|플루크쾨르퍼그루페 12de)
- * 제13미사일그룹 (Flugkörpergruppe 13|플루크쾨르퍼그루페 13de)
- 제2미사일비행단 (Flugkörpergeschwader 2|플루크쾨르퍼게슈바더 2de)
- * 제21미사일그룹 (Flugkörpergruppe 21|플루크쾨르퍼그루페 21de)
- * 제22미사일그룹 (Flugkörpergruppe 22|플루크쾨르퍼그루페 22de)
5. 폐기
중거리 핵전력 조약이 1988년 5월 27일 비준된 후, 퍼싱 시스템은 제거되었다. 미사일은 1988년 10월부터 철수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미사일은 1991년 5월 텍사스주 캐도 호수 인근의 롱혼 육군 탄약 공장에서 모터의 정적 연소로 파괴된 후 압착되었다.[2] 서독은 조약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1991년 퍼싱 1a 미사일을 자국 재고에서 제거하기로 합의했으며, 미사일은 미국에서 파괴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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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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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をMGM-31A、Ia をMGM-31B、II をMGM-31Cとする説もあるが、定かで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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